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틴 루터 (문단 편집) == 루터와 동시대인들 == * 요한 폰 슈타우피츠 처음에는 루터를 지지했으나, 1518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루터가 가톨릭교회와 멀어지는 것을 목격하고 루터를 남겨 놓고 먼저 떠나버렸다. 떠나면서 루터에게 순명 서약을 해제한다고 말을 남겼는데, 루터는 이를 충격적으로 받아들였고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요한 폰 슈타우피츠는 교황청의 압력으로 [[아우구스티노회]] 독일 주교 대리를 사퇴하고 잘츠부르크 수도원으로 옮겼고, 루터추종자라는 혐의로 감시를 받았다. 1524년 죽기 전 편지를 루터에게 보내며 루터에게 많은 것을 배웠으며 변함없는 사랑을 느낀다고 편지했다. 슈타우피츠가 종교개혁 자체를 반대했다기보다, 루터가 가톨릭교회와 멀어지는 것을 반대한 것이었다. 그가 루터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도 루터가 적극적으로 숨김없이 인정했고, 영적인 아버지이며 하나님의 도구로서 역할을 다했다고 칭송했다. 그가 죽은 지 10여년 후, 요한 폰 슈타우피츠가 남긴 저작들은 이단드립에 열 올린 [[클레멘스 7세]] 시절 가톨릭교회에서 금서로 지정했다. * [[에라스뮈스]](Desiderius Erasmus Von Rotterdam) 루터보다 한 세대 연상인 인문학자로, 루터 이전에 유럽에서 이미 가톨릭교회 비판자로 명성이 높았다. 에라스뮈스는 루터 이전에 당대 성직자들의 부패와 위령 미사, 성물 공경 등을 신랄한 풍자와 독설로 비판했는데 근본적으로 이는 후배 루터와 일치했다. 그럼에도 학자로써 가톨릭 인사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교황 [[레오 10세]]와도 친분이 있어서 이단 고소를 다 면제해줬다고 한다. 초기의 루터의 개혁에 대해선 [[95개조 반박문]]과 이단 심문이 이어질 때는 루터를 지지했지만 1520년 루터가 가톨릭교회에 등을 돌리자 사이가 멀어졌다. 당시 에라스뮈스는 가톨릭교회와 결별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고, "나는 더 좋은 것이 발견될 때까지 이 교회와 함께 할 것이다. 두 악 사이에 놓인 중간노선을 항해하는 사람은 서투르게 길을 헤쳐 나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존 가톨릭교회 비판을 그만둔 것은 아니지만, 평화와 일치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루터와는 달랐다. 가톨릭에서는 그리스어 원어 신약성서를 쓴 공로를 찬양하던 데서 입장을 바꾸어 에라스뮈스의 그리스어 성서를 이단에게 자국어 성경 번역에 영감을 주어 결국 그가 루터를 키웠다며 비판했다. 루터파에서도 종교개혁에 영감을 주고 일시적으로 지지했다가 일만 저질러놓고 뱀장어처럼 도망갔다며 비난했다. 이로써 에라스뮈스는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하기 위해 매우 난감한 처지에 처했다. 하지만 에라스뮈스를 비롯한 인문주의자들은 루터의 독일어 성서 번역이나 만인사제설에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에라스뮈스 개인은 가톨릭교회의 타락상에 대해 평신도의 도덕적 회복과 자성이 중요하며 성서를 언젠가 자국어로 번역되어 읽힐 것을 바라긴 했다.] 인문주의자들은 하인들과 얘기할 때는 유감스럽게도 자국어를 써야지 가장 높이 치는 것은 그리스어, 그 다음이 라틴어, 그 다음이 히브리어였기 때문. 플라톤의 그리스어 문체와 키케로의 라틴어, 히브리어 구약성서는 당시 인문주의자들에겐 이상향이었고 추구해야 할 가치였다.[* [[춘추전국시대]] 경전드립이랑 [[한나라]] 때 고문이랑 [[당송팔대]]가 드립치는 조선 유학자들을 연상하면 될 듯.] 또한 만인사제주의는 지식으로 가톨릭교회를 깠지만 높은 존경과 지위를 차지했던 인문주의자들에겐 위협으로 다가왔다. --[[선민의식|까도 깔 자격이 되는 유식한 학자들이나 까야지, 어디서 하찮은 것들이 나오면 곤란하다]]는 식-- 가톨릭교회의 비판자들이면서도 태생적으로 높으신 분들 출생이 많은 탓도 있는데, 에라스뮈스 또한 [[수도자]]의 사생아로 성직록[* 가톨릭교회에서는 유력자들 자제들에게 장학금 형태로 교육을 시켰고, 사제가 될지 여부는 강제가 아니었다.]을 받으며 고등교육을 받았고 한때 교황에게 '신앙의 수호자'라 불린 [[헨리 8세]][* 훗날 결혼으로 틀어진 그분 맞다. 루터가 [[7성사]] 중 5성사 폐지를 주장하자 이를 반박하는 글을 써서 교황에게 '신앙의 수호자'란 칭호를 받았다.]에게도 종신연금을 받았기 때문에 잉글랜드에서 작성한 루터 반박서에 고심 끝에 이름을 빌려주었고, 이것이 출판이 되자 사이가 더 불편해졌다. 사실 명목상은 1525년 루터의 결혼으로 절연이었지만 이전인 1524년 루터를 비판하기 위해 자유의지론을 출판했고, 루터는 노예의지론을 발표하며 서로의 주장을 날카롭게 논박하다가 사실상 절연한다. 루터가 수녀 출신 여자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비극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이 루터의 결혼으로 말미암아 희극으로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에라스뮈스의 신학 이론은 그가 혐오해 마지않던 재세례파에서 많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사실 루터도 선배 학자인 에라스뮈스 연구 업적을 많이 사용했고 독일어 성서 번역도 1516년판 에라스뮈스의 그리스어 원어 성서를 참고했다. 1524년 노예의지론과 자유의지론으로 맞설 때조차 오직 에라스뮈스만이 가장 중요한 문제를 파악하고 있다면서 학문적 권위를 인정했다. 그가 죽고 1559년 그의 모든 저작은 전부 가톨릭교회에서 [[금서]]로 [[금서목록|지정되었다]]. 그가 살아생전 십자문양 갑옷을 두른 군인(?) 교황 [[율리오 2세]]가 천국 문턱에서 베드로에게 문전박대당하고 쫓겨나는 해학 섞인 비판극을 익명으로 발표한 게 드러났기 때문. 현재는 동시대의 멜란히톤과 함께, 각자의 정체성{{{-2 (멜란히톤의 프로테스탄티즘, 에라스무스의 가톨릭 신앙)}}} 안에서 이성적이고 온건한 대화를 중시한 인물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 [[호엔촐레른 가문]]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1세가 친형이라 뒷배경으로 아무런 신앙심 없이 사제가 되었고, 거주지엔 고급 창녀들을 여럿 후리며 살았으며 사생아도 두었다. 1517년 교황청에 루터 때문에 면죄부가 안 팔린다고 징징거리다가 다음해에 루터를 이단으로 고발했다. 1518년 [[레오 10세]]에게 --돈을 많이 바쳐서-- 추기경으로 서임되었고, 1519년에는 황제 선거 시 교황청 뜻대로 [[카를 5세]]에 반대하다가 카를 5세가 푸거 가문의 재력을 빌려 매수하니 역시나 넘어간다.[* 선거는 교황 [[레오 10세]]가 밀고자 했던 작센 선제후는 불출마했고 [[헨리 8세]]는 출마 직전 포기,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의 대결이었으나 [[카를 5세]]가 만장일치로 당선되었다. 초반에는 교황의 압력으로 성직 선제후 3인이 프랑수아 1세로 기울고 팔츠 선제후 [[루트비히 5세]]마저 프랑수아 1세를 지지했으나, 선거자금에서 프랑수아 1세가 30만 두카트를 뿌린 반면 카를 5세는 푸거 가문에 50만 두카트를 대출받아서 85만 두카트를 뿌린 덕분이다. 대신 푸거에게 [[티롤]]의 동광 은광 채굴권을 하사했다.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 이후 카를 5세의 충실한 딸랑이(?)가 되어 제국 회의 때 가톨릭 측 인사로 참여 했으며, 1522년 마그데부르크에서 성물장사를 해서 390만년치 연옥 면제에 해당하는 성물을 팔다[* 최초의 인간 [[아담]]을 빚고 남은 흙, [[빌라도]]가 손을 씻은 대야 따위를 진품이라며 고가에 팔았다고 한다.] 루터가 그만두지 않으면 모든 비난이 당신에게 돌아가도록 글을 쓰겠다는 항의편지를 보내자, 그제야 파문당한 인물에게 편지로 존경하는 박사님이라며 사과했고 성물 판매를 중지했다. 1525년엔 루터에게 " 너 실은 추기경 되고 싶어 그러냐?"는 비아냥 섞인 조롱을 했고, 1531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회의에선 루터가 옛 원한을 잊고 '독일에서 가장 고귀하고 높은 성직자' 알브레히트가 개혁에 동참하기 바란다는 편지를 보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고, 제국회의 발언에서 우리끼리 싸우지 말고 튀르크 놈들이랑 싸우자능!이라고 외쳐서 양측으로부터 비웃음을 샀다. 1535년, 자신의 후원자였던 형 요아힘 1세가 사망하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을 물려받은 조카 [[요아힘 2세 헥토어|요아힘 2세]]가 부친의 유언을 씹고 [[루터교회]]로 개종[* 숙부 알브레히트를 매우 싫어했고, 오히려 종교개혁에 동참했던 안스바흐 분가 친척들의 영향을 받았다.]하고, 자신의 영지 마그데부르크와 할버슈타트가 속절없이 개신교도로 개종하자 개신교로 개종한 교회에다가 푸거 가문한테 진 사채 빚을 갚으라고 떠 넘겼다. 1545년 사망하자 루터를 비롯한 독일인들은 그가 [[지옥]]의 가장 깊은 곳에 떨어졌다고 여겼다. * 요하네스 테첼 마인츠 주교의 면죄부를 팔기 전부터 다른 곳에서도 면죄부 판매로 능력을 인정받았고, 간음으로 체포당한 적도 있었다. 1517년 이후 테첼은 그 당시 이름 자체가 욕이 되었고, 자신의 이름과 '면죄부 판매원'이라는 새로운 욕이 등장 할 정도로 욕을 바가지로 퍼먹었는데. 마인츠 대주교가 승승장구한 것과 달리 가톨릭교회에서도 '똥 친 작대기' 수준으로 팽 당하였고--금수저 마인츠 대주교는 괜찮았지만 테첼은 흙수저였던 것이다.-- 1518년 루터를 심문하러 온 밀티츠 추기경이 테첼의 면죄부 판매과정에서의 일부 신성모독성 발언과 판매자금 착복, 사생아 2명을 둔 죄로 공개적으로 맹비난했고, 그의 엄명으로 라이프치히 수도원으로 유폐되었다. 사실 사생아를 둔 건 아주 오래 전의 일이고, 판매과정에서 라이프치히 시장 연봉의 10배나 땡긴 건 사실이지만, 이것은 독일 내 반교황청 분위기를 무마하려는 시도였지 이전부터 알고 있어도 신경도 안 쓴 사안이었다. 때문에 테첼은 수도원에서 울분을 삼킨 채 몸져누웠고, 1519년에 병에 걸려 쓸쓸히 죽어가고 있었다. [[https://en.wikisource.org/wiki/Page:Luther%27s_correspondence_and_other_contemporary_letters_1507-1521.djvu/575|테첼이 쓸쓸히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루터는 편지를 보내 위로해주었다고 한다.]] 편지 내용은 루터는 테첼에게 "나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없으며, 지금 당신을 학대하는 [[수도자]]들도 다른 사람의 도구임을 명심하라 그리고 당신의 죄를 회개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사실 루터는 과격해진 종교개혁 지지자들이 테첼을 때려죽이려는걸 여러 차례 말렸다. 테첼은 '''더 높은 곳'''의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생각 때문. 루터 자신도 [[수도자]]였기 때문에 구조적 원인과 상관없이 도덕적 비난을 하층 사제에게만 돌리는 것에도 분개했다. 면죄부 판매는 마인츠 대주교만의 문제도 아니며, 교황청의 금전적 욕구에서 비롯되었고, 묵인 및 방조, 지원으로 가능한 것 이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자금이 모자라다는 설명이 많은데, [[레오 10세]]의 사치가 더 큰 이유였다. 레오 10세의 7년 재위간 500만 두카트를 지출했고 죽기 전 80만 두카트의 채무를 남겼다. 이 정도의 금액은 세속왕국 하나를 여러 번 파산시킬 금액이었다.] * 필리프 멜란히톤 멜란히톤은 루터보다 14세 연하로 원래 이름은 슈바르체르트(Philipp Schwarzert)였으나, 그의 친척 작은할아버지뻘 되는 로이흐린이 그리스어인 멜란히톤으로 개명시켜줬다.[* 로이흐린은 [[히브리어]] 전문가였다.] 친척 로이흐린처럼 그도 천재과라서 명성을 이어받아 15세에 대학을 졸업하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너무 어리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2년은 여행하며 놀았다. 그러다 17세에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21세에 고전 그리스어 문법 교과서를 썼고, 로이흐린의 추천으로 비텐베르크 대학의 언어학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히브리어]]까지 공부했다. 언어학자였기 때문에 신학 쪽에선 뒤늦게 학사 학위 밖에 없었고 말은 동료지만 루터의 제자뻘이나 다름없었다. 언어학 전문가이기 때문에 루터가 성서를 번역할 때 같이 참여했고, 루터판 성경의 판이 바뀔 때마다 언어학적 감수와 교정을 맡았다. 처음부터 루터의 개혁을 열렬히 지지했으나 혁명가라기보단 현실주의자여서 루터파가 제국의회에 출석할 때 멜란히톤이 주로 출석했다. --자주 양보해서 루터가 자주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 1530년에 작성되어 제국의회에 공인받으려 제출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멜란히톤의 작품이다. 루터 사후에 개신교 동맹이 아작나자 풍전등화 신세의 작센 교회를 지키기 위해 1548년 [[7성사]]와 라틴어 예배 등을 받아들이는 타협안을 가톨릭 측에 제시했다가 루터파 다른 신학자들과 신도들에게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이외에도 루터의 노예의지론을 수정하고, 츠빙글리와 루터사이의 성찬 논쟁을 둘 사이의 중립적 입장이라 말년에는 루터와의 친분은 여전했지만 신학적 입장은 독자적인 해석으로 벌어졌다. 현재에는 루터보다 차라리 에라스뮈스에 가깝다는 평도 있다. 선행으로 인한 구원론을 다시 꺼냈다가 철회하는 등의 혼란은 빚었지만 지금이나 당시나 루터파 신학에서 루터 다음의 위치를 차지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 [[카를 5세]]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는 1500년 태생으로 루터보다 17세 연하인데, 젊은 황제는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내걸릴 때쯤 교회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은 있었다. 전임이자 그의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1세]]도 루터의 처벌에 부정적인 입장이었고, 그의 스승 하드리아노 신부가 가톨릭교회 개혁파였기 때문. 그러한 이유로 1519년 황제 선거 때 루터는 새로운 황제에 기대감을 드러냈다. 1521년엔 루터를 일컬어 "친애하고 존경하는 박사님"이라며 여권을 발급하고, 신변보장까지 하여 굳이 루터를 소환한 것을 '''취소할 기회를 주어서''' 루터가 살아남을 수 있게 했다.[* 이는 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이때 루터에게 신변보장과 안전통행권을 약속할 때도 '''나는 그를 이단자로 만들지 않을 것이다.'''란 다짐을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모두가 알듯이 결과는 루터는 거부했고, 황제는 굉장히 당혹했다고 한다. 기존 약속대로 루터를 풀어주나, 말년에 회고하길 루터는 악마의 대리인이었기 때문에 인간의 약속은 지키지 말았어야 했다며 매우 후회했다. 루터를 추방한 1521년 칙령 이후에 [[프랑스 왕국]]과의 전쟁,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그리고 동생 페르디난트의 차기황제 선거가 겹치면서 칙령을 '''연기''' 했을 뿐, 루터파 추방령과 종교 일원화 정책은 포기하지 못했다. 루터에 반대한 건 교리 차이로 독일이 쪼개질 것이 우려였지, 결코 가톨릭 신앙만 고집한 광신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가톨릭교회와 갈등을 빚었다. [[레오 10세]] 이후 [[콘클라베]]에 자신의 스승인 개혁파 [[하드리아노 6세]]를 추천한 것도 그였고, 가톨릭교회에 공의회를 강요한 것도 황제였다. 로마에서는 황제위주의 공의회 소집 자체를 미적거렸고, [[클레멘스 7세]]가 거의 포로로 잡히자 황제에 굴복한 것. 트리엔트 공의회가 질질 끌자[* 트리엔트는 제국에서 독일 권역의 최남단이었다. 독일에서 하면 황제의 입김이 너무 강하다는 교회의 주장 때문에 합스부르크가 영지 코앞의 트리엔트에서 열린다. 교황청에선 중간에 트리엔트에 돌림병이 돈다는 핑계로 볼로냐로 옮기려다 카를 황제의 협박에 다시 트리엔트로 돌아갈 정도] 자신의 독단으로 기존 가톨릭교회의 교리에 루터파 주장을 앙념쳐서 전 독일에 종교 일원화 명령을 내렸다.[* 황제가 독단으로 섞은 교리(사제 결혼 가능, 평신도의 양형영성체 허용을 선포하자 개신교 측은 가톨릭 교리와 다름없다고 여겼고 가톨릭교회에서도 경악할 내용이었고 나중에 서로 무산된 걸 다행으로 여길 지경.]1547년 개신교 동맹을 격파하고 작센 선제후의 항복을 받으려 비텐베르크에 입성했는데, 1년 전 죽은 루터의 무덤을 지나쳤고, 신하들은 루터를 [[부관참시]]하자고 건의했으나 "나는 산 자와 싸우지 죽은 자와 다투지 않는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루터도 1529년에는 교황 위주의 대 오스만 십자군을 반대하고, 황제가 주도하는 오스만 전쟁에 참여하라 권유하는 1531년까지는 신교도 제후들에게 황제에게 순종할 것을 권유했고 카를 5세의 종교 일원화 루터파 탄압 입장에 '''독일에는 더 이상 지도자가 없구나'''라며 실망은 했지만, 교황과 로마 교회에 보였던 수준의 극단적인 비판까진 하지 않았다. 한편 카를 5세는 슈말칼덴 전쟁 승리로 독일 땅의 종교 일원화에 성공하는 듯 보였으나 * [[헨리 8세]] 1520년 루터의 저작을 반박하여 '신앙의 수호자'란 타이틀을 교황에게 하사받았고 루터에겐 쌍욕을 퍼먹으면서 악연이 시작되었는데, 헨리 8세가 뒤늦게(?) 수장령을 선포하여 [[성공회]]를 창시하고 자신을 지지해 줄 것을 요청하자, 루터는 [[조강지처]][* [[아라곤의 캐서린]]]를 버린 쓰레기라며 상종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 후에는 4번째 아내로 [[클레페의 앤]]을 맞았지만 못생겨서 내쳤다고 알려졌는데, 실제론 가톨릭교회와 황제와 완전히 갈라서고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독일 개신교 제후와 연을 틀려고 계획한 결혼이었다. 그런데도 독일 제후들과 루터파 신학자들은 헨리가 이름만 개혁이고 화체설을 부인한 신도들을 화형시키고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서 뜨뜻미지근한 제도와 교리로 줄타기를 하자 역시 무시했다. 결국 빡친 헨리는 다시 이혼한다. 이 과정에서 루터는 역시 헨리 8세에게 공개적으로 쌍욕을 퍼부었기에, 루터의 보호자 작센 선제후는 외교적으로 매우 난처해졌다. 계속해서 헨리 8세와 [[키보드 배틀]]을 벌이며 출판물을 펴내자,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앙 2세[* 종교개혁을 시도하다 주교들의 반발로 폐위되었는데 정작 후임 덴마크 왕도 쌩까고 종교개혁을 추진해서 루터파 국가가 되었다. 노르웨이도 덴마크 지배하여서 역시 루터파 국가로 변경.]가 루터에게 조금 수위를 낮춰달라고 하자 루터는 헨리에게 정중하게 답신을 하게 되었는데, 헨리는 이걸 보고 찌질하게 정중해진 루터의 편지를 앞에 놓고 자신의 거친 답변을 붙이고 둘을 묶어서 마치 루터가 아부하다 거절당한 걸로 보이는 뉘앙스로 출판해서 독일 전역에 무료로 뿌렸고, 이걸 보고 더 [[빡]]친 루터는 더 높은 수위의 쌍욕을 써댔다고 한다. * 작센의 [[선제후]] * 1517년 종교개혁 당시 작센 선제후는 현자(賢子) 또는 현명공(賢明公)이라 불리는 [[프리드리히 3세(작센)|프리드리히 3세]]다. 내정에서 작센 선제후국에 문화와 예술을 보호해서 인문주의자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비텐베르크 대학의 설립자로 루터의 신학적 주장에 우려를 제기하면서도 제지하진 않았다. 후에 루터의 설교를 듣고서 귀신 쫓고 수호천사를 부르는 데 효험 있다는 성수는 버렸지만 수만 점의 성유물은 포기 못했는데, 단순 계산대로라면 약 5000년어치 연옥 면제권(?)이 있었다. (그의 성유물 컬렉션엔 [[팔레스타인]]에서 직구--사기--한 성녀 안나의 엄지손가락과 [[성모 마리아]]의 모유, [[예수]]가 태어난 마구간의 말구유 조각 같은 것들이 있었다. 이런 건 당연히 연옥 [[까임방지권]]이 한 점에 수백 년씩 늘어난다.) 단 필립 샤프의 교회사에 의하면 말년에 죽기 전 루터교회 성찬을 받았고, 일부 끝까지 미련이 남은 몇 점의 성물들을 제외, 남은 성물들은 전부 다 버렸다. 현자 프리드리히 3세는 적자를 남기지 못하고 1525년에 사망했다.[* 하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는 있었다고 한다.] * 그의 동생 [[요한(1468)|요한]](1525~1532)이 다음 선제후 자리를 이어받았다. 요한은 형보다 더 철저한 종교개혁의 지지자라서 즉위하자마자 형의 성물과 유골 컬렉션을 귀금속은 녹여 팔고 나머지 잡동사니는 싹 태워버렸다. 그 역시 루터에 대한 존경심은 있었지만 루터가 교황 욕을 하도 많이 해서 정치적으로 매우 난처해했다. 루터판 독일어 성경이 교황을 [[삼중관]] 쓴 지옥에서 솟아난 용으로 그려서, 부랴부랴 회수할 정도. 그런고로 1531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회의에 온건파 멜란히톤을 파견하고 강경파인 루터가 가톨릭교회와 황제와의 합의에 방해될까봐 루터에게는 회의 정보를 최대한 늦게 알리려고 빼돌려서 루터에게 욕을 먹었다.[* 루터는 제국추방령이 유효한 상태라 어차피 참여는 불가능했다.] * 요한의 아들 [[요한 프리드리히 1세]](1525~1547[* 선제후 직위는 1547년에 박탈당했지만 1554년까지 살았다.]) 역시 종교개혁을 계속 추진했다. 그의 종교개혁 성향이 굳어지자 카를 5세의 조카와 약혼도 파기되었다.[* 대신 아내로 맞은 게 [[헨리 8세]]의 4번째 왕비 [[클레페의 앤]]의 언니인 지빌레다.] 작센 선제후는 신교도 제후 중에 가장 서열도 높고 세력도 커서 황제의 주 타겟이 되었고 슈말칼덴 전쟁이 벌어지자 제국추방령과 사형선고를 받았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신세였지만 황제와 싸웠고 패망하자 비텐베르크의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을 열고 선제후직 박탈과 영토할양 문서에 서명하고 수감된다.[* 헤센의 필리프는 패전 소식을 듣고 자진 출두하여 감방동지(?)가 되었다.] 수감생활동안 개종압력과 고초를 겪었으나 신앙을 고수했고, 5년 후 가문의 배신자 모리츠가 황제를 역관광시키자 석방되었고 모리츠의 선제후직을 승계를 쿨하게 인정하고, 튀링엔 지방 바이마르에 자리잡았다. 영지 비텐베르크를 빼앗겼고 선대 선제후가 설립한 대학도 넘어갔기에, 남은 영지에서 새로이 예나 대학을 설립했다. 그의 후손들은 튀링엔 소국으로 분할되었고[* 작센 선제후국은 장자 단일상속의 특혜가 있었지만 다른 영토는 게르만 귀족 전통대로 분할상속이고, 루터가 자식들을 차별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지키려고 분할상속한다.] 베틴 가문 에른스트계열의[* 기존의 작센 선제후가 베틴 가문 종가인 에른스트 계열이고 선제후직을 탈취한 모리츠는 방계인 알브레히트 계열이다.] 영지는 분할되어 후손들의 영지들은 코딱지만큼 남았지만 유럽 개신교 제후들에게 계속 존중 받았다.[* 선제후 직위를 뺏기고도 방계가문인 알브레히트 가문이 작센과 폴란드 왕위를 얻었기에 [[베틴 가문]]의 일원인데다가 최초의 신교도 제후이기에 신교도 제후인 브란덴부르크의 [[호엔촐레른 가문]], 하노버의 [[벨프 가문]], [[팔츠 선제후국|팔츠]]계 [[비텔스바흐 가문]], [[네덜란드 공화국|네덜란드]] [[오라녀나사우 왕조|오라녀나사우 가문]]등과 잦은 혼인관계를 이어나갔다. 대표적으로 독일제국 빌헬름 1세의 황후도 베틴가문 에른스트 계열출신 작센 바이마르 아이제나흐 대공가문 출신.] 튀링겐 베틴 가문 에른스트계열 중에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는 에른스트 계열의 막내 뻘인데 현재 [[영국 왕실]]의 직계 조상이다.[* 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인 [[앨버트 공]]의 고손녀인데, 앨버트 공은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의 9대손이다. 그리고 빅토리아 여왕이 속한 [[하노버 왕조]] 또한 베틴 가문과 혼인이 잦았다.] --당대엔 패했지만 후손으론 승리-- * 작센 공작 작센-마이센 공작 [[모리츠(작센)|모리츠]]는 베틴 가문의 방계 알브레히트 계열로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의 8촌이다. 애초에 모리츠는 신교 제후이긴 했는데, 작센 공작령의 알브레히트 계열은 본가 에른스트 계열과 달리 종교개혁시기 원래 가톨릭 제후였다. 1518년 라이프치히 논쟁 때 그곳의 통치자는 모리츠의 백부 게오르크 공작이었는데, 논쟁 중에 빡쳐서 루터를 공격하려고 한 사람이었다. 게오르크 공작은 아들들이 모두 일찍 사망하여 동생이 물려받을 예정이었고, 동생이 루터의 지지자라서 자신의 작센 영토를 합스부르크가 [[페르디난트 1세]]에 증여하려고 하다가 1539년 급사해서, 결국엔 동생이 물려받고 작센 공작령은 신교도로 전향한다. 그는 금방 사망하고 모리츠는 그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영지를 물려받기 위해 신교도가 되었다. 그리고 알브레히트 계열은 본가 선제후 집안 에른스트 계열과도 영토 분쟁으로 적대적이었는데 페르디난트 1세와 동맹을 맺고 본가를 공격해서 1547년 작센 선제후 본가의 영토 대부분을 얻어냈다. 그러나 영토의 신하와 거주민들이 대부분 개신교로 개종한 상황에서 마이센의 [[가룟 유다]]로 불린 모리츠는 통치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고 장인 헤센의 필리프 1세와 황제가 약속한 영토 보상문제 등이 겹쳐서 이번엔 가톨릭군을 역관광 시켰고 다시 개신교 진영으로 돌아(?) 왔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서 작센 선제후 지위를 본가에도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는 선제후가 된지 얼마 안 있어서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의 알키아비데스[* [[프로이센 공국]] [[알브레히트(프로이센)|알브레히트]]의 조카.]와 마그데부르크 대주교령을 서로 차지하려고 전투를 벌이다가 사망하고 그 지위는 동생에게 넘어간다. 150여년 후 작센 선제후는 폴란드 왕 선거에 출마 하려고 다시 가톨릭으로 개종. 작센 선제후는 [[작센 왕국]]령으로 이어지며 거주민은 대부분 개신교이고, 왕실은 가톨릭이었다. * [[울리히 츠빙글리]] 츠빙글리의 인물 정보는 해당 항목을 참조. 현재 학자들의 새로운 연구로 루터와의 사이가 틀어진 원인은 성찬(성만찬) 논란 이전에 이미 서로 상당한 불만을 가진 걸로 드러났다. 루터는 츠빙글리가 지나치게 세속 정부의 일에 참견한다고 생각했고, 영적인 면에서 설교자이자 지도자의 역할을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어디까지나 영적인 싸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싸워야 한다고 입장이었다. 반면 츠빙글리는 루터가 지나치게 작센 선제후에 의존한다고 봤다. 루터는 남독일의 제국도시와 스위스의 시민자치 정치체제를 잘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의 이론 '두 정부론'을 바탕으로 훈계했는데, 츠빙글리는 합리주의자였기 때문에 루터의 성경해석과 온건한 개혁에 불만이 많았다. 결국 두 개혁자는 성찬례 이론 논쟁 전에 틀어질 수밖에 없는 사이였다는 것. 왜 이렇게 늦게 연구가 됐냐면 루터와 츠빙글리 사이의 '''전문 학자가 아니면 아무도 안보고 아무도 관심 없는 내용'''의 일부 편지가 늦게 발견 되었고, 편지상의 신학이론 해석과 연구가 늦게야 진행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 [[장 칼뱅]] 루터는 장 칼뱅을 츠빙글리와 달리 높이 평가했다. 1536년 한 세대 연하인 칼뱅의 저작 ≪교훈과 신앙고백≫을 보고 츠빙글리 같은 무리가 이 사람과 같았다면 틀어질 리도 없었다고 아쉬워했다. 한편 칼뱅은 자신의 동료이며 츠빙글리의 사위 하인리히 블링거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에서 루터를 비판하자, 루터가 위대한 인물이라며 극찬한 후 '''"나는 그가 나를 악마라고 저주하더라도 영원한 존경을 보낼 것이다."'''라며 정색했다. 그리고 칼뱅의 다섯 솔라 중에 3가지는 루터가 먼저 주장한 것을 받아들인 것이며, 일생의 저작 《기독교 강요》초판에서 루터의 저작 《그리스도인의 자유》, 《교회의 바빌론 유수》, 《대소요리문답》을 통째로 인용했다. 우리나라에선 특히 장로회 중심의 개혁교단이 주류라서 칼뱅주의 신학자들이 많아서 루터는 그냥 선구자나 상징이고, 실질적으로는 칼뱅이 다했다는 식의 평가도 일부 있으나, 루터의 강한 영향력 하에 칼뱅 등 후배 종교개혁자들이 이를 따르고 본받았다는 건 여러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